이제 나의 몸을 먼지를 털고
때를 닦아내고
이제 반짝반짝 빚나고 싶다
나를 씻어내리는 빗물은
차갑게 심장까지 얼려 버린다.
나는 죽은 듯 눈을 감는다.
내 얼굴에 눈물같은빗물이 흐른다.
이 비가 그치면
반짝반짝 빚나길
나는 기꺼이 오늘도 비를 맞는다.
나는 오늘도 기꺼이 눈물을 삼킨다
밝은 나는 항상 밖에 있다.
어둡고 음침하고 우울한 나는 속에 갇혀 답답하다.
밝은 나는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외롭지 않다.
어두운 나는 늘 쓸쓸하다.
어두운 나는 이곳에서 혼자 외치고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는 외침을 털어 놓은 숲처럼
이곳은 나의 답답한 속내를 드러내는 공간이다.
실제로 나는 음침하지 않다.
나는 늘 웃고 개드립을 즐겨하며
행복은 모르지만 즐거움과 소소한 재미를 알고
인간에 대한 법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이런 음침한 부분이 있다.
누구에게나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나는 누군가의 거울이 되고 싶다.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나라는 사실.
실은 당신을 공감하고 당신을 이해한다는결 말해주고 싶다.
우울함에 대한 가장 큰 위로는 공감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거.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욕망은 증오보다 간절하고,
질투는 사랑보다 깊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배신감을 안겨주기 위해
사랑보다 열정적인 복수를 한다.
사랑은 소유이다.
사랑하는 이가 나의 소유가 아니면
그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질투가 커져서
어쩌면 그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무 사랑하기에 그를 상처주는 것은
진정 사랑일까?
이 광기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사랑은 아름답고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처절하고 잔인하고 아프고 이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말라리아에 걸려도
에이즈로 살이 썩어가도
총상입은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너무 배가고파 뱃가죽이 등에 붙어도
그들은 늘 무표정하다.
아픔에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나도 한동안 울지않았다.
그래서 괜찮아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내 속은그 어느 때보다도 썪어있다.
죽고싶다.
내가 죽으면 보험금도 안 나오겠지?
나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죽고싶다.
부모님 인생을 헛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내 모든 상처는 부모님이 만들어 주신 건데도
나는 왜 이렇게 그들을사랑하고 있을까?
아마 길들여졌나보다.
사는 게 힘들다.
나는 가난하다.
근데 가난하지 않다.
나는 예쁜 옷도 입고 화장도 하고 매니큐어도 바르고
구두도 신고 커피도 마시고 매일 샤워를 하고
패밀리 레스토랑도 간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겨울에도 파카를 입고 있다.
밤이면 거실등을 꺼놓고 티비를 본다.
학교에 혼자 밥먹을 땐 점심을 네시쯤 먹고 저녁은 굶는다.
우리집은 가족끼리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다.
치킨도 피자도 일 년에 두세번 먹을뿐.
가끔 여유가 있으면 자장면을 시켜먹거나 목살을 구어 먹는다.
나는 날씬해지고 싶으면 굶는다.
헬스나 수영 같은 운동은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줄넘기를 한다.
대학에 온 후 나는 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돈으로 영어 학원에 다니고 머리삔을 사고 구두를 사고
집 밖에서의 나를 꾸미기 위해 돈을 벌었다.
대학은 왜 갔지?
공부보다 사는 데, 남들이랑 동등하게 어울리기 위해
아등바등. 더 노력하고 있는 내 모습.
막상 밖에서는 이런 이중적인 괴로움으로 제대로
웃지도 못하고 늘 그늘져 있다.
내가 징징대면 다른 애들이 짜증내며 피할 까봐
가는 이렇게 속으로 삭히고 있다.
뭐 나도 다른 애가 나에게 징징대며 싫을 거 같으니.
겉모습은 깔끔하지만 내 속은 거지근성으로 가득차있다.
음식을 사먹을땐 아까워서 남기지도 못하고
비닐이나 상자를 모으려고 하는 버릇이 있고
남들이 버린 물건을 한 번 씩 만져보고 괜찮으면 주워오고
휴대폰은 학교에서 충전하고
휴일이면 그냥 컴퓨터하는 것도 시립 도서관에서 하고
책읽는 걸 좋아하지만 책은 한권도 안 사고 다 빌려보고
음악도 영화도 모두 불법 다운로드..
난 이런 내가 부끄럽고 밉다.
나도 돈 주고 음악을 사고 싶다.
나도 팝콘 먹으며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
나도 음식을 적정량만 먹고싶다.
이렇게 거지같이 한 두푼 모아서 산 게 고작
화장품 머리삔 원피스 따위다.
솔직히 ‘쓸모’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내게는 머글 흉내를 내야하는 내게는 ‘필요’하다.
못생긴 나를 감추려 컽을 꾸밀 수록 내 속은 점점 추해지고
결국 더 치장에만 신경쓰게 된다.
나를 좋아하려해도 내가 좋아지지않는다
상황을 바꾸고 싶다.
너무나 간절하게 바꾸고 싶다.
말 뿐이지만. 결국 또 말뿐이겠지.
가족의 죽음은 슬프다.
늘 보고 만지고 대화하던 사람이 사라지면 공허함이 생긴다.
미워하던 가족이라도 더이상 보고 만지고 대화 할 수 없다는 허전함에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오래 전 내가 한번 알았던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기껏해야 그들을 일 년에 한 두번 보거나 어쩌면 몇 년동안 다시 본 적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늘 나라에 있든, 외국에 있든, 같은 동네에 있든 나에게는 그들의 생사와는 상관없이 똑같이 보지 않을 사이임은 같다.
슬퍼할 것은 전해 들리던 그들의 소식이 끊기는 것?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졸업 후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아이의 장례식에 갈 수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슬프지 않았다.
어쩌면 만나지 못하는, 오래 전 연락이 끊긴 사람들은 이미 내 마음 속에서 죽은 사람이 되었나보다.
‘친하다’는 기준 아래 사람들은 내 마음 속에서 이미 깊게 묻혀 버렸다.
나는 그들을 조문해 주지도 않고 무덤가의 잡초도 뽑아주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 속에도 내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으리라.
그리고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리라.
그들과 나는 이방인이된 것이다.
만약 내게 이혼으로 인해 먼 곳에서 오랜시간 보지 못하고 살던 부모님의 죽음과 어린시절부터 쭉 함께 살아온 강아지의 죽음을 비교하라고 한다면 난 강아지의 죽음에 더 슬픔과 쓸쓸함을 느낄지 모른다.
슬픔을 나눌 것을 묵시적으로 강요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이방인으로 낙인이 찍혀 경멸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
절대적인 슬픔이나 기쁨은 없다.
어떤 죽음이든 우리가 슬퍼해주어야할 의무는 없다.
인도적 차원에서의 연민으로도 족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눈물을 강요하는 걸까?
가끔씩은 밤새 울기도 하죠.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도 들어 줄 사람 하나없어 힘이 드나요?
늦었다고 말해도
아무렇지 않은 것 처럼 다시.
시작해도 되요. 우리함께가요
난 여기에 살아있죠.
세상이 힘들어도 내가 이렇게 그리워하면
내 안에 작은 불꽃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정말 기뻤던 적도
정말 힘들었던 적도
정말 아팠던 적도
정말 행복했던 적도
정말 주고싶었던 적도 없었다
내 인생은 늘 그렇게 뜻뜨미지근하다
회색분자
가끔 내가싫다
나를 너무 잘 알아서 싫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아는 것이 두렵다
나처럼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나는 새누리당을 싫어하지만
가끔 진보적인 누리꾼들은 무섭다.
나는 파시즘이 싫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가면 나는 같은 방향이라도 가던 길을 멈추는 성향이 있다.
‘ㅉㅉ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청개구리 성향도 아니다.
가끔 몇몇 사람들이 한 쪽 의견만 수용하고
그게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을 따라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기본적으로 공권력을 믿는 편이다.
법은 그 어떤 인간보다 냉정한 만큼 공정하고
이중적인 잣대가 없다.
물론 입법부터가 잘못된 경우도 있지만 그건 사법부 잘못이 아니고 입법부의 잘못이다.
가끔 사람들은 음모론이나 정의감에 취해 행동 한다.
데스노트를 가지고 있던 라이토가 wrong이 된 것도
자신을 신이라 생각하면서 이다.
나는 사람들이 좀 더 겸손하고 다른 사람 의견을 존중해주고 분노보다는 다음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
“그럼 가만히 있냐?”라고 꼬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있던 일을 무한히 곱씹는 것보다는 다음을 위한 준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치성향은 종교만큼이나 민감해서 여간 말하기 어렵지 않다.
앞으로는 서로 헐뜯기보다는 이해하고 설득하려는 쪽으로
정치를 이야기 나누었으면한다.